처음에는 단순한 생존 이야기처럼 보일 수 있으나, 그 껍질을 벗겨내고 들여다보면 인간의 자유, 권력, 기억, 이념에 대한 무거운 질문들이 촘촘히 배치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사야마 하지메는 이 작품을 통해 현대 사회와 인간 본성에 대한 깊은 성찰을 시도했으며, 단순한 '거인과 인간의 싸움'을 넘어, 각 인물이 내리는 선택과 그것이 불러오는 결과를 통해 우리가 사는 세계를 낯설게 바라보게 만든다. 이 글에서는 『진격의 거인』이 어떻게 그러한 철학적 담론을 애니메이션이라는 형식 안에 풀어냈는지를 천천히 짚어보고자 한다.
기억과 이념으로 봉쇄된 세계
『진격의 거인』이라는 제목을 처음 접했을 때, 독자와 시청자는 일반적으로 괴물과의 싸움을 그리는 서사를 예상하게 된다. 작품 초기 역시 그러한 기대를 충족시키며 빠르게 이야기를 전개해 나간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이야기가 안쪽에서 바깥으로 확장될수록, 그것이 단순한 괴수물이나 생존 드라마가 아니라는 점이 드러난다. 이 작품의 진정한 힘은 서서히 밝혀지는 세계의 구조, 그리고 그 구조를 감추고 있는 기억과 이념의 층위에 있다.
벽 안의 사람들은 세계의 전부가 자신들이 사는 성벽 안이라고 믿는다. 이는 누군가에 의해 철저히 기획된 기억과 정보 통제를 통해 가능해진 신념 체계다. 마치 근대국가가 교육과 매체를 통해 국민 정체성을 구성해 가는 방식처럼, 벽 안의 사람들은 자신이 속한 세계와 역사를 철저히 '배운 대로' 인식하고 살아간다. 그러나 이 기억은 조작된 것이며, 이념은 특정 목적에 복무하고 있었음이 이후 밝혀진다. 그 깨달음의 순간, 주인공 엘런 예거는 더 이상 기존 질서 안에 머물지 않고, 그 질서 자체를 무너뜨릴 결심을 하게 된다.
『진격의 거인』은 이처럼 이념이 만들어낸 기억, 그리고 그 기억을 살아가는 인간이 겪는 혼란과 각성을 매우 정교하게 묘사한다. 단순한 정보가 아니라 '내가 누구이며 어디에 속해 있는가'에 대한 정체성이 뒤흔들릴 때, '인간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이 작품은 그러한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그 질문은 결코 허구에만 머물지 않는다. 이는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에서도 충분히 유효한 문제제기이며, 현실의 정치와 역사 속에서도 반복되어온 이야기다. 서론에서는 이러한 문제의식의 출발점을 짚어보았다. 이제, 본격적으로 작품의 중심인물인 엘런 예거를 통해 이 주제를 더 깊이 들여다보려 한다.
주인공의 궤적
엘런 예거는 『진격의 거인』이라는 작품의 핵심 축이자, 가장 해석의 여지를 많이 남기는 인물이다. 처음 등장했을 때 그는 단순하고 직선적인 인물로 보였다. '모든 거인을 없애겠다'는 결의는 뜨거웠고, 관객의 공감도 이끌어냈다. 하지만 그는 기억을 이어받고, 벽 밖의 진실을 알게 되면서 급격하게 변해간다. 그의 분노는 이제 단순히 거인을 향한 것이 아니라, 왜곡된 구조 자체를 향하게 된다.
그의 변화는 단순히 극적인 전개를 위한 설정이 아니다. 이는 억눌린 현실을 살아가던 개인이 진실을 마주했을 때, 어떤 선택을 하게 되는가에 대한 깊은 질문이다. 엘런은 점차 '모든 것을 되돌리기 위해 모든 것을 파괴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른다. 그는 해방을 위해 억압하고, 자유를 위해 살육을 감행한다. 이런 모순된 행보는 결코 쉽게 재단할 수 없는 복잡한 윤리적 딜레마를 낳는다.
엘런의 방식에 반대하는 인물들도 다수 등장한다. 아르민과 미카사, 리바이 등은 그를 저지하기 위해 나서지만, 동시에 그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다. 그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세계를 지키려 한다. 작품이 제시하는 다양한 시선은 이 세계에 단 하나의 정답이 존재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그것이 『진격의 거인』의 가장 인간적인 지점이다. 누구나 옳고, 동시에 누구나 틀릴 수 있다는 불완전함을 받아들이는 것. 그 불완전함 속에서 우리가 진짜로 지켜야 할 가치는 무엇인가를 묻는다.
이러한 복잡한 구도는 '기억의 계승'이라는 장치를 통해 더 강화된다. 엘런은 선대의 기억을 이어받으며 새로운 자아를 구성해나간다. 그 자아는 과거의 감정과 현재의 논리를 혼재시키며 더욱 파괴적인 방향으로 나아간다. 이는 마치 인간 개인이 사회와 역사 속에서 어떻게 구성되는지를 보여주는 은유이기도 하다. 우리는 단지 지금의 나만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축적된 경험과 서사의 집합체로 이루어진다. 그런 점에서 엘런의 비극은 결코 특별한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이 겪을 수 있는 내면의 갈등이라 할 수 있다.
사라지지 않는 질문과 남겨진 여운
『진격의 거인』은 최종화까지 다다랐을 때에도 어떤 확정적인 결론을 내리지 않는다. 엘런은 죽고, 그의 선택은 멈추지만, 그로 인해 세계가 근본적으로 바뀌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오히려 작품은 그 이후에도 여전히 인간은 갈등하고, 혐오하며, 서로를 의심하게 될 것임을 암시한다. 이는 단지 허무주의적 결말이 아니라, 인간 사회가 지닌 본질적인 한계를 드러내는 냉철한 통찰로 읽힌다.
작품이 끝난 이후에도 독자와 시청자들은 여러 질문 앞에 선다. 엘런은 과연 옳았는가? 자유란 무엇인가? 우리는 어느 지점에서 멈춰야 했는가? 그리고 이 질문들은 단지 작품 안에서만 유효한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사는 세계에서도 여전히 유효하다. 이사야마 하지메는 이 작품을 통해 애니메이션이라는 형식을 빌려 인간 존재의 본질적인 고민을 끌어올린 것이다.
『진격의 거인』은 그런 의미에서 매우 드문 작품이다. 대중적이면서도 철학적이고, 감정적인 동시에 냉철하다. 그 균형을 끝까지 놓치지 않으며, 마지막까지 관객에게 생각할 거리를 남긴다. 단순한 '엔딩'이 아니라, '질문'을 남기는 작품이다. 그것이 바로 이 이야기가 지금까지도 회자되는 이유이자, 하나의 예술적 성취로 평가받는 이유일 것이다.
마지막으로, 『진격의 거인』이 던진 질문에 대해 각자는 자신의 자리에서 답을 찾아가야 한다. 그 답이 옳은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질문을 받아들이는 자세, 그리고 그 질문을 통해 세상을 조금 더 깊이 있게 바라보려는 태도다.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이 거대한 이야기가 진정으로 바라고 있던 결말이 아닐까.